2011. 10. 6. 11:32ㆍ☆음악창고
김정호 '이름 모를 소녀'(1974)
독창적으로 슬펐던 뮤지션이 남긴 발라드의 원형
1971년과 1972년에 걸쳐 김민기, 양희은 등 포크의 거장들이 출현했지만 TV 속 세상은 여전히 이미자와 나훈아로 대표되는 트로트 천하였다.
균열이 일어난 건 1973년이었다.
청년층의 지지를 얻어낸 통기타 포크는 트로트 이외의 것을 들려주고자 했던 뮤지션들과 필연적으로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그 열망의 산물은 1973년부터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 국민의 지지를 얻어낼 만큼 눈부시게 진화했다.
이장희의 ‘그건 너’가 1973년의 대표자라면 김정호의 ‘이름 모를 소녀’는 1974년을 대표하는 포크의 돌연변이였다.
김정호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어니언스의 데뷔 앨범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임창제의 곡이라 적혀있던 ‘작은 새’, ‘사랑의 진실’, ‘저 별과 달을’, ‘외기러기’, ‘외길’ 5곡의 원작자로 뒤늦게 밝혀졌기 때문이다.
어니언스의 대표곡은 ‘편지’였지만 사람들은 그가 창조해낸 민요와 국악과 포크의 절묘한 융합에 매료되었다.
이듬해 그가 어니언스에게 주었던 곡들과 신곡을 섞어 자신의 데뷔 앨범을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다시 한 번 매료되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 깊이가 달랐다. 그가 직접 부르는 노래는 새로운 차원의 절창이었다.
‘이름 모를 소녀’에는 실로 김정호의 모든 것이 들어있었다.
팝의 일반적인 진행방식을 따르지 않는 곡 구조, 통기타의 느슨한 리듬, 불분명하면서도 신비로운 버스(verse)의 멜로디,
끊어져버릴 듯 절절한 후렴, 어렴풋이 느껴지는 민요 혹은 국악의 향취가 서로를 은밀히 공유했다.
곡을 이토록 애달프게 만들어놓고서 그는 무대 위에서 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기로의 몰입, 비탄의 극한을 향해 치닫는 모습이었고, 지금껏 가요의 역사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이었다.
변진섭과 신승훈과 윤종신의 음악적 선조로 김정호를 곧장 연결시키는 건 무리가 따르겠지만,
적어도 정서적 측면에서 그는 한국 발라드의 원형을 제시한 인물임에 틀림없다.
곡의 전주를 넘치도록 채우는 현악 합주가 요즘 발라드에도 똑같이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할 때,
‘이름 모를 소녀’는 음악적으로도 발라드의 선배 노릇을 한다.
물론 1974년의 현악 세션은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삽입되었다.
그때는 트로트든 팝이든 음반의 전체 연주를 책임지는 악단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고,
악단을 지휘하는 악단장이 중요했으며, 그의 편곡이 중요했다.
이것이 우리가 지금까지 이봉조, 정성조, 김희갑 등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유다.
‘이름 모를 소녀’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닐곱 명이 항시 머리를 맞대며 연주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풍경에서 여러 명의 현악 합주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김정호의 음반을 책임진 악단장 안건마는 달리 평가 받아야 한다.
안건마는 악단 고유의 연주색을 관철시키거나 일관된 편곡을 적용시키는 정도가 다른 악단장들에 비해 덜했다.
그는 김정호에게 딱 맞는 옷을 입혀준 편곡자였다.
그가 입힌 현악 합주와 오르간 연주는 김정호의 슬픔을 더 슬픈 것으로, 더 세련된 것으로 만들었다.
김정호와 안건마의 만남. 독창적으로 슬펐던 뮤지션과 그를 완벽히 뒷받침해준 편곡자.
둘의 결합은 이듬해 발표한 두 번째 앨범에서 더 다채롭게 빛을 발했고 ‘하얀 나비’는 ‘이름 모를 소녀’와 맞먹는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그도 당대의 사건을 피하지 못했다. 대마초 파동에 이름을 올리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 김정호는 ‘이름 모를 소녀’의 실제 모델이었던 여인과 결혼하여 짝사랑의 오랜 슬픔을 덜어냈다.
그것이 음악을 뺏긴 자의 슬픔까지 덜어내 주었을까?
해금된 직후에 발표한 [인생(人生)]의 ‘그날’을 들어보면 그는 여전히 비탄의 극한으로 빠져들고 있다.
파트너 안건마와 함께. 1985년 그는 폐결핵으로 죽었고, 그가 리메이크해 불렀던 ‘사(死)의 찬미’는 트리뷰트 앨범의 타이틀이 되었다.
<다음 뮤직에서 옮겨 적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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